답변
-
울릉도 지킴이, <안용복> / 문화유산해설사 이남숙
우리 정부는 1952년 1월, 인접 해양에 관한 한국의 주권을 선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는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커졌다.<사진설명 : 부산 수영공원 안용복 장군 동상>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국민들은 크게 격분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점에 한 치의 의혹도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일부 인물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늘날까지 독도는 일본과의 영유권 시비에 휘말려 있는 상태이다.
조선 후기에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가 왜국의 영유권 시비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오늘날 울릉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가운데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이는 17세기에 일어났던 왜국과의 영유권 시비 과정에서 대마도의 농간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울릉도의 영유권을 확고히 지켰던 인물이 부산 동래에 살던 어부 안용복의 활동 덕분이다.
울릉도는 6세기초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후, 항상 우리의 영토였다. 그런데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약탈이 이어지자 조선 정부는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였고, 왜구가 소멸된 이후에도 조선인의 울릉도 거주는 금지되었다. 정부의 부역과 군역을 피하여 울릉도에 숨어드는 백성이 생겼지만, 뱃길이 멀고 험하여 제대로 조사하기는 어려웠다.
공도정책으로 인하여 울릉도에 조선 정부의 통제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자 대마도가 울릉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대마도는 거의가 산지이고 경작지는 섬 전체의 3%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대마도주가 1407년(태종 7년)에 울릉도로의 집단 이주를 조선 정부에 건의하였다가 거절당한 사건이나, 1612년(광해군 4년)에 울릉도의 지형을 조사하려다가 거절당한 사건 등은 울릉도에 대한 대마도의 관심을 잘 말해준다.
울릉도에는 배를 만들 나무, 각종 수산자원 등이 풍부하므로 정부 몰래 남해와 동해 연안의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는 일이 있었고, 일본 어부들이 몰래 들어와 고기잡이를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점점 일본 어부들 사이에 울릉도가 명백한 조선 영토라는 생각이 약해지면서 양국 어부들의 울릉도 영유권 시비 가능성이 증가하였는데, 이런 와중에서 안용복이 조선의 울릉도 영유권을 일본 정부에 항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안용복은 1693년(숙종 19년) 봄, 동래, 울산의 어부들 40명과 함께 울릉도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안용복은 동료 박어둔과 함께 일본에 끌려갔다. <사진설명 : 울릉도 약수공원 내의 안용복 충혼비>
잡혀간 상태에서도 안용복은 굴하지 않고 일본 중앙 정부인 막부에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왜국 어부들의 울릉도 침범의 부당성과 불법 납치 행위에 대해 따졌다.
그 결과 막부의 조처에 따라 안용복 일행은 울릉도와 독도(당시 이름은 자산도)가 조선 영토라는 점을 인정한 막부의 문서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선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대마도주의 농간으로 그 문서를 탈취 당하고 초량 왜관에 3개월간 붙잡혀 있다가 동래부로 보내졌다.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대마도주의 중간 농간은 계속되었다. 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을 동래부에 인계하면서 조선 정부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울릉도의 일본 이름)에 침범한 죄인을 송환하니, 조선 정부는 앞으로 조선 어부들의 다케시마 고기잡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항의 문서에 울릉도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 영토 다케시마’라고 표기한 점은 대마도의 농간의 극치였다. 울릉도와 다케시마는 별개의 섬이며, 그런 와중에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착각을 유도하려는 속임수였다. 조선이 그 점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항의 문서를 수용하면 이를 빌미로 울릉도를 탈취하려는 속셈이었다.
대마도주의 서한을 받은 조선 정부는 그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다케시마와 울릉도가 동일한 섬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고, ‘일본 영토 다케시마’에 대한 침범 항의를 수용하면서도 ‘울릉도가 조선 영토’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여 대마도주의 농간을 봉쇄하였다.
당황한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 영토’라는 표현의 삭제를 요청하자, 오히려 일본에서 송환된 안용복의 진술을 통하여 대마도주의 속셈을 정확히 파악하고 강력한 항의 서한을 일본 정부에 보냈다. 조선은 울릉도가 다케시마라고도 불리지만 명백한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고, 안용복 등이 조선 영토에서 납치된 사건의 부당성을 항의하였다.
이 시비는 1696년 1월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대마도의 집요한 획책과 대마도의 의도를 파악한 조선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 대립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막부는 전후 사실을 검토하여 1696년 1월, 다케시마로 불리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 사실을 분쟁과 관련된 대마도에 통보하였다.
대마도는 관례에 따라 막부에서 결정한 이 내용을 조선에 통보해야 하는데도 미루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안용복은 1696년 봄,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왜국 어부들을 발견하고 동료 11명과 함께 왜국으로 쫓아 들어가 해당 지역의 태수에게 항의하고, 막부에 항의 문서를 올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동안 대마도가 행한 불법적 농간을 폭로하고 왜국 어부들이 조선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에 불법 침범하였음을 보고하려는 의도였다.
이 두 번째의 일본행 때 안용복은 ‘울릉, 우산 감세장(鬱陵 于山 監稅將)’이란 깃발을 배에 걸었다. 우산은 자산(子山)을 잘못 쓴 글자이며 독도를 가리킨다.
시비의 초점은 울릉도에 있지만, 인접한 독도를 왜국 어부들이 마쓰시마(松島)라 부르며 불법 어로 행위를 하기 때문에 입장을 분명히 해두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한 감세장이라 칭한 것은 자신의 항의가 개인의 입장이 아니라 조선 관료의 입장임을 보이려 했음을 나타낸다.
이 사건은 대마도를 크게 당혹스럽게 하였다. 이 문제가 막부에 보고되어 확대되면, 이미 막부에서 울릉도의 조선 영유권을 공인한다는 결정을 내린 마당에 대마도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대마도는 막부가 울릉도의 조선 영유권을 인정했던 공식 문서를 1697년에 조선 정부에 보냈다. 이로써 영유권 시비는 극복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안용복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안용복은 동래부 전선(戰船)의 노군(櫓軍) 인데, 왜관에 출입하여 왜말에 능하였다.’ , ‘안용복은 동래 사람이다.’ , ‘본디 동래에 살았는데 어머니에게 문안하려고 울산에 갔다’는 정도의 내용이 전해지는데, 이로 미루어 그는 동래부 관할 지역에 살던 수영의 수군으로서 초량 왜관에 출입하며 왜국말을 배운 것 같다. <사진설명 : 부산 수영공원의 안용복장군 충혼탑>
최근 일본에 남아있는 안용복의 신상 기록이 소개된 바 있는데, 여러 가지 기록 가운데 눈길을 끄는 자료는 당시 안용복이 허리에 찼던 목패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그 목패는 조선 후기 수군이 신분 증명을 위하여 허리에 차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내용은 그가 서울에 사는 어떤 인물의 사노(私奴)로서 이름이 ‘용복’이며 당시(1693) 나이는 36세였고, 초량 왜관에 가까운 좌천동에 살았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그는 조선의 네 신분 가운데 천민에 속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를 안용복 장군이라 높여 부르기를 원하며, 그를 위한 기념비와 탑에도 모두 ‘안용복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호칭은 당시 안용복이 울릉도, 독도의 영유권을 지키기 위하여 보인 활약상을 오래도록 기억하자는 바램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독도 영유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부산 시민들의 정서, 나아가 우리 국민 모두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독도 역사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독도 조선영토로 표기한 김대건 신부 제작 '조선전도' (0) | 2019.09.18 |
|---|---|
| 일본 막부, '독도는 조선땅' 명백히 인정…‘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 공개 (0) | 2019.06.21 |
| 1891년 일본 검정 지리교과서에 독도는 한국 땅 (0) | 2019.02.24 |
| 독도가 우리땅인 이유,근거와 일본이 일본땅임을 주장하는 근거에 대한 반박을 알려주세요. (0) | 2019.02.12 |
| 김문길 소장 “독도가 일본 땅 아니라는 극비 문서 발견” (0) | 2018.10.26 |